fjrigjwwe9r0UNIMO_MULTIBOARD:Brd_Contents 고래
작가 : 천명관 출판 : 문학동네 발매 : 2004.12.18
〈고래〉
거칠 것 없이 써내려 간 느낌이 강하게 들고, 정제되지 않은 원시의 자연의 언어를 그대로 가져다가 쓴 소설, 그 동안 읽었던 소설들과는 전혀 다른 느낌과 생각, 현실과 허구의 경계를 넘어서고, 공간을 무시하는, 인간의 상상력이 무한함을 보여주는 소설… 이 책 〈고래〉를 읽으면서 느꼈던 생각들이다. 과거 신파극에서 변사가 이야기를 읽어주는 방식으로 전개되는 이 소설은 정말 특이하다. 비현실적인 설정과 인물이 등장하고, 기존의 자연의 법칙들을 위반한 내용들을 보면 판타지 소설의 느낌도 있다.
소설은 부두와 평대라는 가상의 마을, 그리고 벽돌공장으로 장소를 이동하고, 노파, 금복, 춘희라는 인물들을 시간순으로 배열하며 이야기를 풀어간다. 물론 노파와 금복은 피붙이 관계는 아니지만 3대에 걸친 시간으로 인해 일제시대부터, 군부독재에 이르기까지 방대한 시간의 흐름을 목격하게 되고, 이야기의 서사는 일정한 사건들의 집합과 연결, 인물들의 갈등으로 이루어져 있어 엄청난 스토리의 결합체라고 볼 수 있다. 소위 스케일이 크다고 해야 할까? 물론 기존 소설들이 가지고 있는 인간내면에 대한 묘사나 심리적 갈등은 별로 없고, 이야기 자체에 천착된 부분이 특이할 만 하다. 작가는 마치 이야기 자체를 위해 태어난 사람처럼 정신 없이 이야기를 풀어낸다. 만담꾼이 따로 없다. 쉴새 없이 새롭게 쏟아져 나오는 이야기에 독자도 정신을 못 차릴 정도다. 호흡을 가다듬을 필요가 있다. 살인과 폭력, 죽음이 일상적으로 발생하고 가볍게 처리된다. 그래서일까 이 소설에는 무협지, 판타지, 성장소설, 대하역사 소설의 온갖 장르의 색깔이 섞여져 채색되어 있다.
긴 이야기는 평대라는 마을에서 살았던 소박맞은 박색의 노파에서 시작한다. 노파가 젊었을적에 마을의 대갓집 반편이 아들과 부적절한 관계를 맺고, 반편이를 익사시키고, 부적절한 관계 속에서 태어난 딸을 양봉업자한테 팔아버린 후, 세상을 증오하며, 국밥집을 운영하며 살아간다. 하지만 양봉업자한테 팔려갔던 딸이 장성하여, 큰 돈을 벌었다는 자신의 엄마인 노파에게 찾아 와서 돈을 이유로 협박하다 엄마를 죽인다.
같은 마을 평대에 사는 어린 금복은 아버지와 함께 살지만 평대를 떠나 새롭고 더 큰 세상으로 나가기 위해 생선장수차에 자신의 몸을 맡기고 부둣가에 정착하여 사업수완을 발휘하여 덕장을 만들어 말린 생선을 팔아 부자가 되지만, 뱃노동을 하는 거인과 사랑에 빠져 다시 가난하게 되고, 그 와중에 거인은 일을 하다 몸을 크게 다쳐, 야쿠자 출신의 깡패와 만나 자신을 의탁하게 되고, 오해에 의해 거인(걱정)은 자살하고 깡패(칼자국)는 금복이 살해한다. 그리고 누구의 아이일지 모르는 벙어리 춘희를 낳는다. 금복은 고향 평대에 돌아와 노파가 운영했던 국밥집을 자신이 운영하면서 커피도 함께 팔아 돈을 번다. 하지만 돈을 많이 벌었다는 이유로 동네 건달들에게 성폭행을 당하고, 돈을 빼앗기지만 오래된 국밥집의 천장이 장마로 무너지면서 노파가 숨겨놓은 어마어마한 돈이 천정에서 떨어져 대박을 맞고, 그 돈으로 벽돌공장을 만들어 성공을 한다. 운수업에도 손을 대고, 심지어 고래모양의 극장까지 지어 무한한 자본의 힘을 맛보지만 결국은 노파의 저주로 극장이 불이나 극장 관객 8백명과 함께 죽음을 맞게 되고, 극장에서 난 대화재로 인해 평대는 폐허가 된다.
금복의 딸 춘희는 방화범으로 몰려, 옥살이를 마치고 출감하여 벽돌공장에서 벽돌을 찍어낸다.
벽돌을 만들면 어릴 적 함께했던 사람들이 올 것이라는 헛된 희망을 품고 있었기 때문이다.
춘희는 태어날 때부터 거대한 몸으로 엄청난 괴력을 소유한 여자였지만 말을 못하는 벙어리인데다 머리도 모자랐다. 하지만 어릴 적 알고 지내던 또 다른 괴력을 가진 남자가 공장에 찾아와 정분을 나누고, 결국 아이를 낳아 키우지만 병에 걸려 죽는다. 정분을 나누었던 괴력의 남자도 겨울철 눈길에 트럭이 미끄러져 죽게되고, 춘희도 벽돌공장에서 노파가 될 때까지 매일매일 벽돌을 만들다 죽는다.
몇 년이 흘렀다. 그녀는 홀로 벽돌을 굽고 있었다. 다시 몇 년이 흘렀다. 그녀는 홀로 벽돌을 굽고 있었다.
몇 년이 흘렀다. 그녀는 홀로 벽돌을 굽고 있었다. 공장을 찾아온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409~413쪽
먼저 왜 고래일까? 금복은 바다에서 뛰노는 고래를 보면서 엄청난 크기의 고래에 매력을 느낀다. 물을 뿜어내는 고래의 힘에 경이로움과 카리즈마를 느꼈을 터였다. 그래서일까 등장인물에 자신이 사랑했던 거인 걱정과 딸 춘희는 고래처럼 힘이세고 거대하다. 태어나기도, 죽는 것도 너무도 가볍다. 가볍게 아무렇게 태어나는 것도, 죽는 것도 작가의 마음대로 요리된다. 스토리를 만드는 작가의 힘이다. 소설은 자본, 욕망, 복수, 상처를 다룬다. 하지만 정확한 메시지가 어떤 것이지 마음에 확 다가오진 않는다. 많은 이야기 속에서 인물들이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것과, 장대한 스케일을 가진 소설로 특별한 느낌을 주지만, 아쉬운 것은 역시 메시지의 지향점과 등장인물들의 내면의 소리이다. 하지만 그 것까지 기대했다면 소설의 분량은 두배로 늘어났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존의 형식을 뛰어넘는 새로운 소설이라는 점, 소위 제도권이 아닌 음악으로 따진다면 언더그라운드에서 꽃 핀 전혀다른 양식의 새로운 음악처럼 다가오기에 느낌이 좋다.

〈고래〉 / 천명관 / P455 / '13.3.30 by East-hill(출처) |